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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이야기/품고다녀야 할 화두

상까라 차리아- 최고의 분별지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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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마나 마하리쉬가 직접 번역한 쌍카라 차리아의 "분별정보"-

 

                                            본     문

 

인간의 몸을 받기는 실로 아주 어렵다.

설사 인간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부라민(사제계급)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설사 부라민이 된다 하더라도, 베다를 찬송하는 베다적 다르마(수행자)의 길을

걷기는 더욱 어렵다.

완전한 학자가 되기는 더 어렵고,

진아와 비진아에 대한 탐구를 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기의 직접 체험으로 부터 나온 진지(眞知,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 진지로써 "부라만(신)의 모양으로 안주함"에 의한 해탈은 무수한 생을 통해

이룩한 선행(善行)이 없이는 성취 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조건들을 다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약 다음 세가지 조건만 갖추면,

주(主, 최고신))의 은총을 통해 해탈이 보장된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 나는 것,

해탈에 대한 열망,

그리고 대성인(大聖人)들과의 만남이다.


모순 아닌가 !

만약 어떤 사람이 대단한 따빠스(구나)에 의해

그 귀하디 귀한 인간의 몸을 받고 경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데도,지각능력 없는 것들(육체 현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자신의 참된 성품인 해탈이라는 불변의 상태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실로 그런 사람은 자살죄를 범하고 있는 바보라고 할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의 실질적인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큰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경전을 독송한다던가, 신들을 숭배한다거나, 의식을 거행한다거나,

신에게 귀의하는 등의 방법을 천만 겁(劫)동안 행한다 할지라도,

부라만(宇宙神)과 아뜨만(自我)의 동일성을 아는 '앎'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해탈을 성취 할 수 없다.


따라서 여러 경전에서 행위는 해탈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간의 쾌락에 대한 그 욕망부터 영웅적으로 포기해야 하고,

그런 다음 평안의 화신(化身)인 완전한 스승을 찾아야 하며,

자신의 마음을 집중하여 스승이 가르쳐 준 것에 대해 부단히 명상해야 된다.


그리고 그러한 명상을 통해 얻은 앎(眞知)안에 안주 할 수 있게 되어,

그 앎의 배를 일단 띄웠으면,

윤회의 바다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을 해탈의 언덕까지 건네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용기있는 구도자는 아내,자식, 그리고 재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모든 행위를 포기해야 하며,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추구해야 한다.


수행행위는 마음을 정화하기 위하여 권장 될 뿐,

실재(實在)를 깨닫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실재에 대한 앎(眞知)은 진아탐구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수행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밧줄(實材)을 뱀(幻影)으로 오인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겁에 질리는데,

그의 공포와 불안은 그것이 밧줄임을 앎으로써 해소된다.

즉, 그것이 밧줄인 줄 아는 사람이 그렇다고 말해주면,

그는 살펴보고나서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마찬가지로 부라만에 대한 앎(眞知)는 스승의 가르침과 실재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얻어지며, 목욕제계, 보시,조식(호흡수련) 기타의 행법으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진아의 실재를 깨달아 해탈을 얻으려고 열망하는 자는,

욕망에서 벗어나 있고 "부라만을 아는 자"이며 은총의 바다인 완전한 스승의 도움을 받아서

진아를 탐구해야 한다.

역량있는 사람이 진아지를 얻는 것은 주로 탐구를 통해서 이다.

장소,시간, 그리고 主의 은총은 그 탐구의 보조수단일 뿐이다.

 

                                                                         -다음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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