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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이야기/품고다녀야 할 화두

修行(수행)과 8식론(8識論)

석가모니부처님 심의식은 같다.  마음은 연이생한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우리가 보통 마음이라고 여겨지는 단어들을 3가지로 구별해서 쓰셨는데 심의식 즉 심(citta) 의(意, mano) 식(識, vinnana) 이라고 합니다.

 

예를들어 대표적으로 이렇게 쓰셨습니다.

 

색수상행식에서 식은 식(識, vinnana)입니다.

안이비설신의 에서 의는 의(意, mano)입니다.

마음청정에서 마음은 심(心, citta)입니다.

 

이러한 심의식을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다양하게 사용하셨지만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가에 따라 그렇게 불리는 것이지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당신이 아버지 아들 삼촌 부장으로 불려도 당신이란 존재이듯이 심의식은 똑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심의식의 특징으로 가장 중요한것은 마음도 무상고무아이라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의 식도 찰나생/찰나멸하는 연기법에 의해 일어나고 소멸합니다.

 

 

세친 5 6 7 8식을 설하다. 마음은 연이생이다. 의타기성이다.

 

 

세친을 비롯한 유식의 논사들은 마음이 같은 것이 아니라 전5식 6식(의식)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이 있다고 분별하였습니다.  전식득지는 식의 허구성을 되돌려 무아-연기와 공을 철견한 반야가 현전했다는 말입니다. 8식인 아뢰야식은 대원경지로, 7식인 말나식은 평등성지로, 6식인 의식은 묘관찰지로, 전5식은 성소작지로 전식득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유식의 논사들은 부처님과 달리 식을 다르다고 분별하였으나 식이 어떤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식30송에서 식을 식전변(vijn$aana-parin*aama)이라고 하여 흐름(srota)라고 이해하고,  세친스님의 적통인 안혜 스님은 이를 조건생(緣而生)이라 설명하고 이를 다시 인찰라의 소멸과 과찰나의 일어남으로 설명하고 있고 규기의 성유식론술기에서는 찰나멸의 종자생멸로도 설명합니다.

 

세친은 유식30송에서 식이라 하니 무슨 실체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까봐 식의 삼성과 삼무성을 강조합니다. 식의 삼성은 잘 알듯이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인데 핵심이 의타기성임은 모든 책들이 한결같이 말합니다. 의타기란 바로 연이생, 연기, 찰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의타기 즉 연이생 연기-무아를 철견한 것을 원성실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변계소집성이라 합니다. 이렇게 세친은 식이 아뢰야식이 무슨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연이생(의타기)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삼무성은 이러한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이 모두 실체가 없음을 더욱 분명히 밝힙니다. 원성실성은 승의무성이므로(즉 승의=제일의공이기 때문에 원성실은 실체 혹은 식체가 없다는 것임) 실체가 없으며, 의타기성은 생무성(즉 의타기=연이생=조건생이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은 불변하는 식체가 없음을 뜻함)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며, 변계소집성은 상무성(즉 나니 내것이니 법체니 식체니하고 변계소집하는 것은 그 성질/특징(相, laksana)으로 볼 때 실체가 없다는 말임)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유식의 설명입니까? 이것을 이해해야 중도를 논할 자격이 있는 사람아닐까요? 이렇게 세친은 유식30송에서 식이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친도 이렇게 설명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니 자아니 대아니 참나니 진아니 심지어는 대승불교의 여래장이나 불성 등의 가르침조차도 무언가 존재의 배후에 불생불멸로 존재하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실로 많습니다.

 

 

초기경전과 유식

 

현재에 전해지는 초기경전은 아함경과 니까야로 볼수 있겠습니다. 아함경과 니까야는 여러 경로에 활짝 오픈되어 있으므로 가능하다면 유식의 논의를 초기경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어떻게 설하셨는가를 반조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경전에 밝은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이 심의식을 유식처럼 분별해서 설하신것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유식을 공부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아뢰야식을 부처님이 부정하신 무아의 반대인 진아 영혼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것입니다.

 

아함경과 니까야를 읽으시면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원음을 확인하시는 분들은 유식을 공부해도 되고, 굳이 공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위빠사나로 색수상행식을 철견할때 전오식 6식 7식 8식이런 가르침과 무관하게 해탈열반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픈사전에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이라는 항목이 있어 조금 인용하여 봅니다. 전체글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0302&eid=W3njUJ1afFZWJVCvOZShiM3kx25FSPKu&qb=w8qx4iC6uyC4tsC9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

 --- 각묵 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 목차 ―

1. 들어가는 말
2. 마음의 사전적 의미
3.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4.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5. 마음은 무상하다
6.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이다
7. 마음은 흐름이다
8.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9. 마음은 연이생(緣起, 조건발생)이다
10.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11.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보는 것이 해탈이다
12. 무상․고․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13. 맺는 말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한다. 한국의 불자들은 ‘마음 깨쳐 성불한다.’거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일체유심조).’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를 심학(心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심리학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초기불교에서는 과연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이러한 관심에서 홍법사의 대중논강 첫 번째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을 것이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할 점은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무아는 불교를 특징짓는 말로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반야/중관과 유식을 망라한 모든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뜨만이니 자아니 대아니 진아니 하는 무언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실체가 나라는 존재나 세계의 안에 혹은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개념(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만일 우리가 마음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생각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를 역설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한국불교 일반에서는 마음이니 자아니 대아니 참나니 진아니 심지어는 대승불교의 여래장이나 불성 등의 가르침조차도 무언가 존재의 배후에 불생불멸로 존재하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실로 많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홍법사 대중논강의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다고 발제자는 이해한다. 발제자는 이제 몇 가지 측면에서 이 주제를 소화해내고자 한다.

 

 

 

阿賴耶識(아뢰야식)

 【범】 ālaya vijñāna 8식(識)의 하나. 9식의 하나. 불교 유심론의 하나인 뢰야연기(賴耶緣起)의 근본 되는 식. 진제 등은 무몰식(無沒識)이라 번역하고, 현장은 장식(藏識)이라 번역. 앞의 것은 아(阿)를 짧은 음으로 읽어 아는 무(無), 뢰야는 멸진(滅盡)ㆍ몰실(沒失)이라 번역하여 멸진ㆍ몰실하지 않는 식이라 한 것이고, 뒤의 것은 아를 긴 음으로 읽어 가(家)ㆍ주소(住所)ㆍ저장소(貯藏所)의 뜻이 있으므로 장식이라 한 것임. 『성유식론』 제2에 의하면, ‘장’에 세 가지 뜻을 들었으니, (1) 능장(能藏). 만유를 내는 친인(親因)은 종자를 갊아 두는 식이란 뜻. (2) 소장(所藏). 8식 중 다른 7식에 의하여 염법(染法)의 종자를 훈습하여 갊은 식이란 뜻. (3) 집장(執藏). 제8식은 오랜 때부터 없어지지 않고 상주하므로 자아(自我)인 듯이 제7식에게 집착되는 식이란 뜻. 그러나 이 가운데서 주로 집장의 의미로 장식이라 하므로 아애집(我愛執)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 이르면 아뢰야란 이름이 없어짐. 또 다른 이름으로 법상종에서는 불도 수행의 도정을 3분하여, 아뢰야(阿賴耶)ㆍ비파가(毘播迦)ㆍ아타나(阿陀那)의 이름을 붙임. 아뢰야는 제7 말나(末那)가 제8식을 자아의 존재처럼 집착하는 자리에서의 제8식의 이름. 비파가는 이숙(異熟)이라 번역하니 선악의 업으로 인하여 받은 자리에서의 제8식의 이름. 아타나는 부처님 지위에서의 제8식의 이름. 이미 자아의 집착이 없어지고 또 업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물질과 마음의 여러 법을 발현케 하는 종자와 5근(根)을 집지상속(執持相續)하는 자리의 제8식이므로 아타나(執持)라 함. 이식은 종자(이 식 속에 갊은 깨끗하거나 더러운 세계를 발현할 수 있는 세력) 5근ㆍ기세간(器世間)을 소연(所緣)으로 하기 때문에 각자의 아뢰야로써 우주 만유를 전개하는 근본이라 하고, 현상인 실재를 말하는 진여연기론에 대하여, 진여를 본체로 하고 진여에 즉하지 아니한 가유(假有)의 현상을 인정하여 뢰야연기론을 이루게 된 것임

-출처: 불교사전, 이운허 저, 동국역경원-

 

동국역경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불교사전과 한글대장경 원문 등을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정치한 설명이 나온 곳으로 '대승기신론'이 유명합니다.

一心眞如라는 우주의 근본이 無明에 의해 처음으로 일체의 현상을 나타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無明을 8식이라는 수준에서 설명합니다.

8식 즉, 아뢰야식을 좀 더 세분화하여

三細라고 하는데요

무명업상(無明業相)ㆍ능견상(能見相)ㆍ경계상(境界相)으로 구분됩니다.

 

1. 무명업상은  진여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적 현상을 내게 되는 첫걸음으로서, 아직 주관ㆍ객관이 갈라지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2. 능견상은  무명업상이 주관ㆍ객관으로 갈라져 대립된 때에, 그 주관적 방면을 말합니다.

 

3. 경계상은 능견상인 주관의 앞에 나타나는 객관적 대상의 경계. 진여 본성에 계합하지 않는 허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밖에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고도 구분하는데

三細의 구분과 유사합니다.

 

禪家에서는 궁극적인 최고 경지의 깨달음인 구경각究境覺을 말할 때 이 아뢰야식의 번뇌까지 멸한다고 합니다. 화두을 깨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오매일여와 몽중일여, 동정일여도 이 팔식설을 언급하면서 묘사하기도 합니다. 성철 큰스님의 선문정로와 혜암 큰스님의 법어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修行(수행)과 8식론(8識論)

 

[ 수행 ]
 

승찬대사는 좋다 나쁘다라고 분별하지만 않으면 대도란 어렵지않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짐을 덜어논 후의 촌평과 같은 말이다

 

마음으로써 분별하지 않으면서 관념을 지어내지않 으면서 일상을 살아가긴

특히 오늘의 현대인에게 매우 힘든일이다

 

그래서 이시대에는 사뭇 대단한 자각과 분발심이 필요한 것이다

일상이 스피디한 것 뿐만이 아니라 대기중에는 수많은 상념체와 지박령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한적한 곳이 오히려 더욱 수행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대명제에 집중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모든 번뇌 망상을 버리고 그대 자신의 자성에 집중하고

그 위대한 자성부처만이 그대의 진실로써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몸(정확히는 감각)은 수많은 함정속에서 우리를 속이고 있다.

자신이 알고있는 자신에 대한 개념들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은 자신의 위대한 불성의 진동을 수용하지 못하도록하는 함정이다

그런데 그 함정은 모두 스스로 가 파놓은 것들이다

 

해탈은 자신이 묶어놓은 포박줄을 스스로 풀어놓는 것이다
마음의 차원에서는 결코 자신의 불성을 자각할 수없다
마음(아스트랄체,멘탈체)은 불성이  이 물리적 세게를 탐구하기위한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마음은 단지 그러한 도구적 수단에 머물러야한다

 

마음이 그대의 심장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된다
마음이 잠잠해지고  마음이 자신을 한정하지않을 때 ,
마음의 저편에서 무엇인가가  현현한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실상이며 모든 성인과 범부들의 실상이며

대광명이니그것은 머리로 참구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포승줄이 풀려질때  그대는 더이상 그 누구에게도 의문을 품지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의문을 품는 자아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思論) 마음의 포박줄을 푸는 방법 

 

   -一切橫厄(일체횡액)

   - 大受大命(대수대명)

   -束迦天里(속가천리) - 魔(마)를 묶어서 막아 천리로 보낸다 (天導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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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識(식)의 체험 ]

 

불교에서도 주지하시다시피 부처님의 말씀은 교요  그 뜻은 선이라합니다.

선과 교는 둘이면서도 하나요 하나이면서도 둘이라합니다

그래서 문자에 빠져 지해선에 불과한 교학자가 될수도 있을 것이고
선을 통달한 다음  교를 주석하여 선교양면에서  대가가 될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방대한 범어원전을 번역한  서역의 구마라집이나

띠벳의 역경사 마르빠가 모두  심학의 대가들이었던 것으로 알고있으며

 

우리 해동에서도 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교학자는  역시 원효대사를

거론합니다만 원효의 깨달음은  대승의 보살로 인정하고있습니다.

먼저 생사를 초월한 우리의 본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것을 거론케된 것은  우리의 생사관의 문제가 먼저 이곳에서 제기되었고

그런 차원에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님의 말대로 이것은 언설로 적확히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위자아의 사변작용으로는 그것을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자체를 묘사한다는 것은 허공을 잡으려는 행위일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그 본성의 진동을 조금이라도 맛본이라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공감할수 있지않을 까하는 차원에서 본다면

이러저런 표현을 해보는 것이 전혀 무익하리라고는 보지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인끼리는 선문답같은 동문서답을 하기도 하고 합니다만....  님과의 사이에 선문답을 나눌상황은 아닌 것 같고 ...
그 표현에 있어 불가피한 면이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표현하는 것이 마땅히 비난한다면 또  비난받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은오직 서로  공명하느냐  않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두번째로 여여함에 대해 그것이 무슨 글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인용을 제대로 햇습니까?)

어떻게 그런 관점을 생각케됬는지 자못 의아합니다만..

이 여여함에대해서는 우리자신의 본성과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을 존재의

양태를 말로 표현한 것에 다름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이  남이  쓴 글도 말도 이해못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관점이라 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라하는 것은  환영적인 의식의 차원 불교유식학에서 이야기하는

6식과 7식의 무명번뇌가 완전히 제거되어서
우리의 의식이 제8식에 가닿게 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

되도록 선문답적인 표현은 자제하겠습니다

 

그럼제8식에서는 여래장이라하는 우리의 진여자성을 품고있어서
수행자는 그자성의 여여함의 진동을 하위의식이 그대로 비추일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제8식의 미세망상이 완전히 제거되지않으면
본성이 완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것은 마치 구름이 있으되 구름사이로 햇빛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경우와 같다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일별 이라하고 보조선에서는 돈오라하기도 하는데

성철스님같은 분은 전혀 돈오로 인정하지를 않습니다만
저는 성철스님과는 조금 견해를 달리합니다.

 

8식의 아주 미세한 망상까지도 소멸되면 그대로 자성이 확연히 드러나서 

전6식과 7식이 완전히 전변하게 되고  이른바 구경각을 성취하게됩니다.

 

신지학적 차원에서 애기한다면
아시다시피 우리의 마음즉 마나스는 하위마나스로서

여러가지 종자에 물들어있는 업식입니다

아시다시피 하위마나스는 프라나와 또 오용된 아스트랄체와 더불어 죽음과 동시에 소멸합니다. 단  정화된 마나스식에 한해서는 상위마나스에 흡수됩니다.  이것을 도가에서는 정혼이라합니다만...


하여간 제가 죽음과 삶을 초월한 본성이라하는 것은
하위마나스의 전변을 통해서 부디,마나스의 빛을 우리가 현재의식속에서 담아내게 될때는 수행자는 확실히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원인체의 진동을 통해서 진보된 수행자는 이원성을 초월한  여여한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봅니다.


억지로 신지학적 개념으로 유추해 보았습니다만 ...
하여간 우리의 상위자아즉 원인체는 여여하고 당당합니다
그는 윤회의 주체이면서도 확실히 물리적 세계를 초월하여있고

동시에 신성한  상위차원의 빛을 담고있어서
우리 수행자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여한 본성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백치가 되는 것이아니라
사고의 정묘함과 고도의 직관력이 생기게 되고
영적감각이 개발되어  영계교류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사고와 분별력에도 엄연히 그것이 작동하는 차원이 있는바
하위자아의 분별 그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 그것을  제어하고 일단은 그 작동을 멈추어서
상위차원의 빛을  끌어들일수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밥먹고 공부하고 회사다니는 분별 그 자체를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일정시간은 그 사고와 분별을 멈추고 관하고 있어야 되며

그것이 익어지면 분별과 관은 하나속에서  녹아지는 때가 오게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분별에도 우리가 피해야되는 분별이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개인의 고정관념이나 이미지 심리적 기억과 같은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사물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때에 장애가 되는 것들이며

 

이 공부가 불교의 8정도의 중요한 공부과정이된다고 봅니다

바로 보는 것 바르게 생각하는 것....  굉장히 쉽지않은 공부입니다

 

출처 :http://blog.empas.com/adep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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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思論 ] 修行(수행)과 8식론(8識論)

 

식() 중에 제일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인데,

이것은 가장 바깥에 나타난 거친 식이며, 맨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이른바 전5식()이라고 한다.

 

이 전5식을 총괄하는 분대장격인 가장 가까운 식이 의식()인데,

이것이 6번째에 있으므로 제6식()이라고도 한다.

이 제6식의 근간이 되는 식이 다름아닌,

아의식()이 강한 자아의식으로 제7식()이라고도 한다.

이것은산스크리트로 ‘마나스’이며 한문으로말나식()이라고 표기한다.

 

그리고 8번째의 제8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하나의잠재의식이다.

이 식은십이연기()의무명(),행(),식(識)해당하는 것으로

온전히 깨끗한 상태가 아니다.

본래는 깨끗한 식이었는데 밝지 않은[] 것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진()과 망()이 함께 있다고 하여

진망화합식()이라고도 하고,

본래 깨끗한 것이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고 하여

장식()이라고도 한다.

이것이산스크리트의 ‘알라야’로 곳간에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이 8식에 가리고 있는무명()이 없어진 밝고 맑고 깨끗한 상태를 이루는 것을반야(), 즉 지혜를 이룬 경지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눈런庫코렷喘몸의 다섯 감각기관과

이를 통솔하는 의근(意根)을 육근이라 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인식대상이 육경(六境)이다.

즉 눈으로 보는 것은 색경(色境),

    귀로 듣는 것은 성경(聲境),

    코로 냄새를 맡는 것은 향경(香境),

    입으로 맛을 아는 것은 미경(味境),

    몸으로 느끼는 것은 촉경(觸境),

    마음으로 아는 것은 법경(法境)이다.  

 

이 육경이육근과 중층적으로 합해져인식체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12처설()이다.

 

육근이인식의 주체인 인간 존재라면 육경은 인간의 환경과 그를 둘러싼 현상으로, 모든 우주는 이 십이처에서 비롯되어 이 십이처로 들어간다. 이 십이처설은 인간이인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모든 존재는 인간의인식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으로,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설의 기초를 이룬다.

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십이처에 육식()을 합한 것이 18계()이다.

 

 

8고(8苦); 보통 네 가지로 말하는 4고(),

즉 생() 노() 병() 사()에,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인 애별리고(),

    원수와 만나는고통인 원증회고(),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고통구부득고(),

    그리고오온(), 즉 나를 구성하고 있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가

    너무 치성()한고통인,오온성고()를

    더하여 8고라고 한다.

 

  

3수(受)

3행(行) : 신(身).구(口).의(意)  3업행(業行)

3계(戒) : 신(身).구(口).의(意)의 악업(惡業)을 지(止)하는 3계(戒)

 

 

*강서 道一스님 선문답

 

  회양스님 : 스님은 좌선하여 무얼하려오?

  도일스님 : 부처가 되려 합니다.

                 (그말을 마치고 암자 앞의 벽돌을 집어와 갈기시작한다)

  회양스님 : 벽돌은 갈아 무엇하시려 합니까?

  도일스님 : 거울을 만들려 하네.

  회양스님 : 벽돌을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도일스님 :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회양스님 :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도일스님 : 소수레에 멍에를 채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회양스님 : ...

  도일스님 : 그대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우는가, 앉은 부처를 배우는가.

                 좌선을 배운다고 하면 禪(선)은 앉거나 눕는데 있지 않으며,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하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도 아니다.

                 머뭄없는 법에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죽이는 일이요,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竹影掃皆塵不動(죽영소개진부동)

   대그림자가 마당을 쓸지만 먼지하나 움직이지 않고

 月暎澤底水無痕(월영택저수무흔)

   달그림자가 우물속을 비추지만 물위에는 흔적조차 없구나

  

   오직 修行(수행)은 내마음을 거울처럼 맑게 닦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