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료지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만일 삼세의 일체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하라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니
☞ ≪80화엄경(華嚴經)≫ <보살설게품(菩薩設偈品)>; ≪화엄경(華嚴經)≫卷제19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화엄종의 중심사상으로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니, 인간의 주체적 관점에서 보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뜻일 게다.
<기신론(起信論)>에서 "…如來大師云 三界虛僞 唯心所作(여래대사운 삼계허위 유심소작) 여래께서 이르시되 삼계(과거·현재·미래)가 허위이니 오직 마음의 작용일 뿐이니라" 한 것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통일신라 때의 고승 원효(元曉)에 얽힌 이야기다.
때는 서기 661년(문무왕 1). 원효(元曉)는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 길에 오른다. 두 사람은 당항성(唐項城: 南陽)에 이르러 어느 무덤 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잠결에 갈증을 느낀 원효는 근처의 웅덩이에 괸 물을 달게 마시고 갈증을 푼다.
날이 새고 깨어 보니 잠결에 마신 물은 해골이 잠긴 물이었다. 순간 원효는 심한 구역질을 느끼며 비명을 지를 지경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원효는 새로운 한 경지를 깨닫게 된다. 밤새 마신 물이나, 지금 눈으로 보는 물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같은 물이다.
왜 간밤에는 달게만 느껴졌던 물이 지금은 구토를 느낄 정도로 더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분명 물이 변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달다'거나 '더럽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보다 그것을 보고 마시는 사람의 마음의 작용이 아닌가.
그렇다. 사물 자체에는 처음부터 정(淨)도 없고, 부정(不淨)도 없거늘 모든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지은 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하고 그 길로 유학의 뜻을 접고 서라벌로 돌아온다.
다음은 원효가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달은 뒤 읊었다는 게송이다.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감분불이
삼계유심 만법유식 심외무법 호용별구)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안과 밖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하니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 1976년 동짓달 서운성수(瑞雲聖洙) 스님이 쓴 선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