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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인동 찜갈비 골목

정신개조 2007. 6. 25. 11:46

[경상도 맛길기행 .21] 동인동 찜갈비
제자 : 蘭汀 李美蘭
멋없는 '양은 양재기' 맛내기 '이등공신'

간장에 슬쩍 익혀 미리 장만해 둔 찜갈비
"양은 양재기가 효자지."

동인동 찜갈비 식당의 트레이드 마크인 볼품없게 생긴 양은 양재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그러지고 찌그러진 이 양재기가 분명 지난 30여년간 동인동 찜갈비 유명세를 올려준 것만은 사실이다. 반듯하게 생긴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에 찜갈비를 담았다면 과연 대박이 터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막걸리는 양은 주전자, 찜갈비는 양은 양재기가 제격 아닌가.

70년대 대구의 대표적 갈비골목 2곳은 동산동과 동인동. 동인동 1·2가는 일제 땐 종합운동장과 수영장이 있는 일본인 동네였다. 광복 직후엔 평범한 주택가로 주저앉다가 난데없이 찜갈비가 등장하면서 일약 전국적 명물 골목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실비, 화성, 봉산, 낙영, 산호, 월성, 유진, 벙글, 대왕, 동해, 동심, 수복, 아성 등 13개 식당이 밀집돼 있다. 듬성듬성이 아니라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있어 '찜갈비 숲'에 들어온 기분이다.

이 골목 주인들은 10여년 전 동인찜이란 상호를 공동 특허출원했다. 체인사업도 하지 않을 심산이다. 이 골목 주인들은 나름대로 속셈이 있다. 체인 사업에 몰두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타 유흥시설과 연계된 신흥 먹자타운 좋을 일만 시킨다는 계산이다. 결과적으로 동인동 골목을 죽일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체인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 골목은 다른 먹거리 타운과 다른 점이 있다. '공생공사(共生共死) 마인드'이다. 특정 식당이 급부상되는 걸 무척 경계(?)한다. 비슷비슷한 요리법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아님 무한 경쟁 탓인가. 한 식당 주인이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들려준다.

"지역 신문·방송사는 자꾸 특정 업소만 부각하려고 하는데 그건 이 골목한테 결코 도움이 안됩니다. 특정 식당보다 이 골목이 부각될수록 동인동 찜갈비 전통은 더욱 빛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골목 간판엔 '원조'란 말이 안보인다. 주인들 모두 '일그러진 과열경쟁'을 몰아낸 탓인지도 모른다.

현재 이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동네 중앙에 위치한 실비 찜갈비 식당. 경산 자인 출신의 박만수씨(81)는 13년 전 박문일(54)·윤금화씨(51) 부부한테 가업을 물려준다. 박만수씨는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기질을 갖고 있다. 그가 1968년쯤 식당 문을 연 연유가 흥미롭다. 극동택시·버스 사업을 했던 박씨는 유달리 얼큰한 음식을 좋아했다. 온 몸이 땀범벅되는 복날이 되면 일찌감치 정육점에 가서 갈비를 직접 사들고 온다. 집에서 직접 도끼를 들고 갈비를 분해한다. 가마솥에 푹 익힌 뒤 일부는 소금에 찍어먹고 속이 느끼하면 마늘과 고추를 듬뿍 넣고 비벼먹었다. 후자가 압권이었다. 그걸 맛 본 친구들이 한 마디 거든다. 대구에 아직 이런 음식이 없으니 식당 차리면 돈 될 것 같다고 부추겼다. 부인 정연생씨(70)도 가세했고 그런 연유로 찜갈비 식당이 태동된다.

60년대 후반 대구 식당가는 동산동 실골목 내 진갈비, 계산 땅집 등 때문에 갈비·불고기 전성시절을 맞는다. 찜갈비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당시 이 골목엔 한시택시 사무실과 얼음창고(현재 주유소) 등이 드문드문 들어선 주택가였다. 도로도 포장돼 있지 않았고 승용차 2대가 겨우 교행할 정도로 먼지 나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식당으론 별로 승산이 없어 보였다. 실비 찜갈비는 그래도 12평 한옥을 빌려 영업을 시작했다. 식탁 2개 들어가는 쪽방 2개와 계단 밑 골방 등 3개 룸만 있었고 홀은 없었다. 가게 앞에 살평상도 놓여 있었고 단골들은 차 먼지 묻은 갈비를 개의치 않고 맛있게 먹었다. 처음엔 연탄불로 찜갈비를 만들었고 갈비 5대가 1인분(500원)이었다.
고춧가루와 마늘 등 기본 양념이 들어간 상태
이 거리가 뜨는 기점은 거리가 포장된 75년.

실비집이 생기고 난 뒤 좀 세월이 흘러 봉산, 낙영, 화성이 들어선다. 현재 벙글집은 선술집이었고 산호는 여관, 유진은 2층 양옥, 그 이남은 주택지였다.

실비집은 키다리 씨름선수 이봉걸과 인연이 깊다. 이봉걸은 한때 좌절기가 있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챔피언 양념 통닭 체인사업에도 뛰어들었지만 그는 비즈니스맨이 되기엔 감각이 딱 2% 부족했다. 하지만 이봉걸은 실비집에 자주 와서 자신이 찜갈비집을 경영해보고 싶으니 양념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3년간 간청했지만 실비집은 난색을 표했다. 이봉걸의 장래를 생각한 고육책이었다.

동인동 찜갈비맛은 양념맛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모방하긴 힘들다. 서울에도 찜갈비가 있지만 이 골목 맛과 다르다. 그래서 골수파들은 일부러 이 골목에 온다.

한 유명 식당 주방장은 작정하고 '양념 정보 사냥'에 나선다. 모든 식당 다 찾아 양념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지만 결국 두 손 들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물론 식당마다 양념 만드는 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평균적 맛을 빚기 힘들다.

◇대구 들른 현대車 이사들 "×밥그릇도 아니고" 불평하다 단골로…

한약재도 가미…불세기 조절로 마늘의 향 다스리기가 포인트

몇 년 전 이 골목에 현대 자동차 이사진 12명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가던 중 잠시 대구에 들렀다. 한 이사가 "이 골목 찜갈비 맛이 죽인다"면서 총대를 멨다. 그런데 막상 음식이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대다수 이사들은 찌그러진 양재기를 보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부 이사는 "×밥그릇도 아니고"라면서 정색도 했다. 안내한 이사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며 맛있게 먹었다. 다른 이사들도 마지 못해 한 두점씩 고기를 먹었다. 식사 직후 이사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고 상당수가 단골이 됐다. 장사가 잘 되던 시절엔 타지 식당에서 이 골목 양재기를 연구하기 위해 고가에 구입해가기도 했다.

숯불갈비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 갈비찜을 낳는다. 갈비찜과 찜갈비. 명칭은 흡사하지만 요리법은 확실히 다르다.

둘 다 갈비고 찜인데 맛은 제각각. 갈비찜엔 삶은 밤, 은행알, 석이채 등이 들어가지만 찜갈비엔 그런 게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고춧가루, 마늘, 설탕, 국간장·진간장 섞어 한약재 물에 버무리면 요리 끝.

찜갈비 맛의 1단계는 좋은 고기 마련. 하지만 한우 가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1인분에 1만2천여원 받고도 수지타산이 안맞는 모양이다. 수입산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실정이다. 절단해 장만한 갈비는 진간장과 국간장을 반반씩 섞어 끓여 익힌 뒤 양재기에 분류해 담는다.

초창기와 달리 요즘엔 황기, 구기자 등 한약재를 가미한다. 주문 받으면 가스 불에 양은 냄비 올려놓고 설탕 조금 가미해 고추, 마늘 넣고 양념에 버무린다. 맛은 마늘이 다 낸다고 보면 된다. 고추는 시각적인 효과만 있다. 찜갈비에 붉은 기운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라. 군침이 덜 돌 수밖에.

마늘의 강한 향을 다스리려면 불 세기 조절에 능해야 된다. 너무 세면 마늘이 닭백숙용 마늘처럼 맥빠져 맛은 증발해버린다. 너무 약하면 매운맛 때문에 맛이 뒤로 밀린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불길. 불길에 도 통하려면 족히 10년은 이 바닥에서 굴러야 한단다.

양재기도 물론 맛의 원천. 다른 철제 용기에 비해 열 전도율이 좋다. 빨리 뜨거워지지만 쉬 식지 않아 선호된다. 양재기 탓인지 기름이 잘 굳지 않는다.


이 골목은 70년대 초 한 선술집에서 술안주 겸 반찬으로찜갈비를 내놓으면서 큰 호응을 얻자 한집.두집 늘어나면서 형성됐다. 그러나 집집마다 맛은 조금씩 달라 저마다 고정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찜갈비의 맛은 고기의 육질 외에도 여러 가지 양념을 버무리는 손끝에서 달라진다고 한다. 60~70년대에나 쓰던 노란색의 찌그러진 양은 그릇만을 고집하는 것도찜갈비집의 특징이다.

가스불에 익혀 손님에게 내놓기 직전의 찜갈비
동인동 찜갈비 식당에선 주문을 받으면 미리 준비해 둔 갈비에 마늘과 고춧가루, 설탕을 함께 버무려 손님에게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