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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영화 ★ 게임/ViDEO GAMe

[펌] 게임 기획자가 되고싶어?


영화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영화판에 뛰어들겠다고 설치는 사람 가운데 80%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다.' 마찬가지로 게임판에서는 게임 개발에 뛰어들겠다고 설치는 사람 가운데 80%는 기획 지망생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과 게임 기획 지망생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영화판을 보자. 영화 제작에 참여하려면 여러 가지 업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기술을 연마해야만 한다. 단적인 예로 영화 감독이 되려면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거나 아니면 밑바닥 스텝부터 시작해서 조연출 등을 거쳐 상당히 오랜 시간 인고의 세월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관문을 통과해서 실제로 '입봉'하는(정식 감독이 되는) 사람은 도전자의 수에 비하면 극소수일 뿐이다. 감독뿐 아니라 카메라나 조명 등 다른 스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배우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외모가 잘 나야 기회가 커지고 얼굴이 안되면 연기력이라도 뛰어나야 그나마 가능성이 생기는데, 연기력을 쌓으려면 스텝이 되는 것 못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데다 배우로 데뷔를 하려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실력과 더불어 운이 따라야 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사정이 이렇다보니 영화판에서 일은 하고 싶은데 마땅히 재주도 없고 노력도 하기 싫은 사람들이 처음에 시작할 만한 것이 시나리오 쓰는 일 밖에 없다. 일단 표면적으로만 보면 시나리오 작가는 적당히(!) 이야기만 써내려 가면 될 것 같고, 그런 작업이라는게 대개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워드질'로 해쳐먹는 일이니까(물론 실제 작업은 워드질로만 끝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쉽게 드는 것이다.

그래서 게임판에 게임 기획 지망생이 많은 이유도 영화판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 많은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프로그래머를 하자니 C 언어니 C++이니 하는 것들이 죄다 외계어로만 보이고, 그래픽을 하자니 재능도 없고 3D Max 같은 프로그램을 배울 엄두가 나지 않는데, 그에 비해 기획자는 그냥 MS 오피스 3종 셋트(워드/엑셀/파워 포인트)만 할 줄 알면 되는 것 같으니 제일 만만해 보이는 것이다.

물론 실무에서 게임 기획자가 주로 다루는 툴이 오피스 3종 셋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게임을 기획하는 일이 어디 오피스 다루는 솜씨만 가지고 될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기획을 만만하게 보고 섣불리 뛰어드는 지망생들이 이 바닥엔 너무나 많다.

이렇게 무턱대고 게임 기획에 입문하는 지망생들을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우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는 게임을 잘 하니까 개발도 잘 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자신만만형'이다. 물론 게임을 잘 하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게임 센스가 있는 것은 게임 기획자에게 있어서 좋은 자질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게이머로서 실력이 좋은 것과 게임 기획을 잘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문제이다. 엄밀히 말하면 능력 있는 기획자들이 게임도 잘 하는 것이지, 게임을 잘 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게임 기획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A 게임의 이런 요소와 B 게임의 이런 요소를 합치면 무조건 성공한다'를 부르짖는 '막무가내형'이 있다. 이 부류는 주로  게임 웹진이나 관련 커뮤니티에서 '서식'하고 있는데, 이들이 보통 하는 얘기들이 대개는 '리니지의 공성전에 WoW의 퀘스트를 더하면 장땡'이라는 식이다. 물론 이와 같은 아이디어들이 모두 다 쓰레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는 것이다. 게임 기획자는 이런 식의 추상적인 아이디어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화해서 실제 게임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개발 실무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다듬는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저 1차적인 아이디어만 내면 게임이 그냥 쉽게 만들어지는 줄로만 알고 있다.

얘랑 얘를 합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게임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획은 아이디어만 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류를 더 말 하자면 '게임 기획자가 되면 돈을 벌면서 게임을 실컷 해볼 수 있으니까' 기획자가 되려는 '게임 중독형'이 있다. 하지만 게임을 실컷 하면서 살고 싶다면 게임 기획가 되기 보다는 돈을 수십억 정도 번 다음 그 자금을 기반으로 게임 개발사나 퍼블리셔 회사를 하나 차려서 직접 사장이 되는 편이 더 낫다. 게임 개발을 한다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회사 차릴 돈이 없거나 투자 받을 능력이 안 되면 그냥 주 5일에 칼퇴근이 보장되는 회사를 다니던지 아니면 자유시간이 많은 직종이나 개인사업을 택하는 것이 상책이다. 대부분의 경우 게임 개발자는 자기가 원하는 게임을 즐길 시간이 다른 직업에 비해서 훨씬 적다.

누구나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대본을 써볼 수 있듯이, 누구나 게임 기획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기획서를 써볼 수는 있다. 하지만 위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은 어줍잖은 생각으로 이 바닥에 뛰어들었다면 마음을 고쳐 먹든지 아니면 늦기 전에 빨리 다른 길을 찾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기획자라는 '어려운 길'을 고집한다면, 이어질 후속편을 기대하시라. 개봉박뚜우우~

지난 1편에서 왜 이 바닥에 기획 지망생이 넘쳐나는지 그 이유와 더불어 게임 기획을 너무 쉽게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아주 먼 옛날에는 그렇게 '넘쳐나는 지망생'들과 별반 차이 없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게임 기획을 쉽게 보고 있었다고 해도 앞으로 생각을 고쳐먹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 그러면 (개념 있는) 기획자가 되기 위해서 앞으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여러분 주변에 현업 기획자가 있다면 보통은 이런 이야기들을 할 것이다.

- 기획자는 오피스(특히 엑셀)를 잘 해야 한다. 그러니까 닥치고 오피스 고고씽
- 기획자는 프로그래밍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열혈강의 C>부터 고고씽
- 기획자는 심리학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심리학 열공하셈
- 기획자는 수학을 잘 해야 한다. 그러니까 수학 정석부터 다시 고고씽
- 기획자는 경제학 마케팅도 알아야 한다. 닥치고 공부공부
- 기획자는 글을 잘써야 한다. 그러니까 작문책부터 고고씽
- 요즘 기획자는 스크립트 언어도 해야 한다더라. 그러니까 LUA부터 고고씽
- 요즘 기획자는 영어도 좀 해야 한다더라. 그러니까 다같이 어륀지~
- 기획자는 야근을 잘 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친하고 미리 결별... 어?!!

자 어떤가? 한 마디로 후덜덜 하지 않은가? 뭐 저기 써있는 사항들을 모두 잘 한다면 게임 기획자가 아니라 초봉 5천 정도 찍고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라도 입사하고 남을 것 같다. 물론 위에 열거되어 있는 모든 항목이 모두 기획자가 해두면 좋은 것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빌 게이츠와 디씨X사이드의 찌질이에게도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루는 24시간이고 일년은 365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배워야 할 것, 해야할 일들을 모두 다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항상 넘쳐나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공부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시간이라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쪼개서 어떤 공부를 하는 것이 내가 기획자로 성공하는데 더 효율적인지를 판단해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하는 것이다.

현실이 이와 같은데, 여러분 주변에 실무 짬 좀 먹었다는 사람이 위와 같은 식으로 단편적인 조언만 하고 끝이라면, 십중팔구는 자기 스스로도 저런 공부를 제대로 해본적이 없는 것이므로 그런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위에 열거된 항목 중 특정분야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해봤다면 저런 일반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더 구체적으로 말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무턱대고 '기획자가 심리학을 알아야 하니까 심리학을 공부해라'가 아니라 UI 디자인을 위해서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참고해라 라든지, 시나리오 & 세계관 설정을 위해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원형 이론과 집단 무의식 이론을 공부해라라든지 하는 답이 나와야 정상이다. '진짜 공부'를 해봤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잘 모르면서 그냥 줏어들은 이야기로 답변하는 것이라는데에 우리 회사 빌딩 구내식당 식권을 건다. (시가 4천원 상당)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주 많은 지망생들이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그 자체도 알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저런 식의 이야기를 나름 조언이랍시고 받아들여서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낭비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빈약한 조언을 들으며 독학으로 공부하는 기획 지망생들은 어떤 과정을 거칠까?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다. 프로그래밍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C언어 기초 책 사서 printf("Hello World"); 몇 번 찔끔 치다가 접고, 누가 또 심리학이 필수라고 해서 어쩌구 심리학 책 사서 한 20~30페이지쯤 읽다가 덮고, 요즘 대세가 스크립트 언어라는 얘기 듣고는 <루아를 이용한 민첩하고 거시기한 게임개발> 책 사다가 제일 첫 예제에서 찍~ 싸고... 이렇게 1년 정도 지나고 나면 배운 건 아무 것도 없고 앞에 몇 페이지 정도만 슬쩍 읽고 다시는 펴보지 않는 새책만 열 권 정도 쌓인다. 자기 얘기하는 것 같아서 찔린다고? 그렇다고 너무 낙심하지는 마시라. 대한민국에 그대와 똑같이 '기획 지망생 독학삽질 정규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만 수천 명은 족히 될 것이니 말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하고 어떤 기획자가 되려건 간에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자신이 직접 게임을 만들어보는 일이다. 혼자서 게임을 어떻게 만드냐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프로그래밍 언어를 연마해서 직접 코딩을 해서 게임을 구현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기획 지망생 천 명이 있다면 이걸 해내는 사람은 1%인 열 명도 안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권장할만한 방법은 공개된 게임 저작툴을 이용해서 만들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유명한 <워크래프트3 월드 에디터>나 <네버윈터 나이츠의 오로라 툴셋> 또는 <RPG 만들기 시리즈> 등을 이용해서 자기만의 소규모 게임을 직접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 대목에서 '에이 그깟 유즈맵 같은 거 만들어보는게 뭐 그리 도움이 된다고'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당신은 게임 개발을 정말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워3 에디터>의 경우는 '그깟 유즈맵'이 아니라, 실제 블리자드의 개발자들이 모든 싱글 미션 켐페인 맵을 바로 그 에디터로 제작했으며 능력만 된다면 레이싱 게임이나 유사 FPS 등도 다 만들 수 있다. 또한 현재 세계 MMORPG 시장을 '아도 치고' 있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개발툴 역시 워3 에디터와 거의 흡사할 정도다.

필자가 현재 '강사질'을 하고 있는 게임 스쿨 기획학과에서는 수강 2개월차부터 워크래프트3 월드 에디터로 게임 제작 실습을 한다. 물론 실습의 목표는 재미있는 유즈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게임으로 구현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각각의 제작 단계별로 발생하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추상적인 아이디어와 구체적인 기획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등 지망생 레베루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교과서적인 개념들을 몸소 깨닫는 것이다. 

게다가 실무에서 사용되는 상용 개발 툴도 이런 에디터와 동작 방식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실무에 가서도 적응하기 쉽다는 장점도 주어지고 문서 작업만으로는 체감할 수 없는 밸런싱 이슈라든지 레벨 디자인 업무 등도 어느 정도는 체험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수강생들의 개념 탑재 및 실력 향상에 엄청난 효과를 보고 있다.

필자가 수강 2개월차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예제로 사용하는 맵의 트리거 구조이다. 플레이 타임 약 10분 정도면 끝나고 퀘스트도 달랑 2개뿐인 간단한 예제이지만 스크린샷에서 보다시피 상당히 많은 '스크립트 노가다'가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걸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게임을 만드는 것이 왜 쉽지 않은 일인지를 몸소 느끼기 어렵다.



여하튼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이렇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간단한 게임이나마 직접 만들어보면 게임을 기획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접 게임을 만드는 경험을 통해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아야만 내가 뭘 배워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래야만 비로소 기획서 작성법이든 심리학이든 수학이든 프로그래밍 언어든 공부를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게임 하나 만들어본 적 없이 기획을 암만 공부하거나 기획서 습작을 써봐야 그저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환상 소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임 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일단 게임을 만들어보라. 그리고 나서 게임 기획 서적을 읽든 다른 걸 공부하든 하라. 이번 편의 핵심은 그냥 이 한 마디가 전부다.

지난 2편에서는 게임 기획을 배우려면 일단 어떤 방법으로 건 간에 게임을 만들어보는 일부터 시작하라고 했었다. 사실 실무 경험자나 지망생 중에서도 적절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에 쉽게 동의를 하겠지만, 그냥 혼자서 독학만 해본 사람이나 그조차도 안해본 사람은 이 대목에서 보통은 '아니 나는 게임 기획자 할 건데 기획만 배우면 되지 뭘 만들어보기까지 해야 해?'라는 의문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본다.

만약 여러분이 야구에서 투수가 하고 싶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야구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투수라는 포지션에 한정된 기술만 연마한다면 어떻게 될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투구 폼이나 직구&변화구 기술 같이 오로지 투수로서 공을 던지는 기술만 익힌다는 뜻이다. 자, 그래서 혼자 힘으로 140km가 넘는 속구와 두어 가지의 변화구, 그리고 신인 선수로서는 괜찮은 제구력까지 갖췄다고 치자. 이 상태로 프로 야구 실전 경기 마운드에 오르면 어떻게 될까? 일단 오로지 혼자서만 연습을 했기 때문에 포수와의 호흡이나 감독의 작전지시 등은 당연히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투구 자체는 좋을지 몰라도 독자적인 훈련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갖가지 문제점들이 하나 둘씩 노출될 것이다.

예를 들면, 포수는 타자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깥쪽에 낮게 깔리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는데, 혼자서 공 던지는 연습만 한 투수는 왜 그런 공을 요구하는지 전혀 알 수 없으므로 사인을 거부하고 자기가 던지고 싶은 공을 던지려고 할 것이다. 비슷한 예로, 스코어 상황과 상대 타순을 감안해서 감독이 투수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는데, 경기 경험이 없는 투수 입장에서는 왜 일부러 포볼을 내줘서 주자를 내보내야 하는지를 이해를 못하니까 그냥 자기 고집대로 정면승부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자가 나가게 되면 그런 실전 상황에 대해서 전혀 대비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견제 동작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사실이 상대팀에 파악되면 주자가 1루에 나갈때마다 연속 도루를 허용해 3루까지 공짜로 헌납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게다가 번트에 대한 수비도 해본적이 없으니 번트나 홈스틸 같은 상대 팀의 여러가지 작전에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다. 예상되는 결과는 2/3이닝 6피안타 1포볼 1사구(열받아서 분노의 헤드샷) 8도루허용 7실점 강판

짤방은 본문의 특정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 제공 코나미 디지털 엔터테인먼트...는 훼이크고 무단게재임


게임을 만들어보지 못한 기획자가 (게임 개발에 대한 개념이 탑재되지 않은 기획자가) 개발 실무에 투입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이 바로 위와 같은 맥락이다. 혼자 기획서만 줄창 써봤기 때문에 자신이 쓴 기획서가 왜 프로그래머나 그래픽 파트에서 제대로 먹히지 않는지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고, 또 해당 파트 담당자들이나 여러분의 상사가 기획서에 대해 어떤 의견이나 요구사항을 제시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고 혼자서 기획하는 스킬만 연마했으니 기획서를 가지고 실제로 구현하는 사람의 입장을 모르고 팀 플레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투수는 스트라이크만 잘 던지면 되는 일이 아니다. 강속구만 잘 던진다고 타자들이 다 삼진 아웃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일부러 유인구로 볼을 던져 타자를 떠보거나, 안쪽 낮은 직구로 스트라이크 아웃을 잡기 위해 바로 전 투구를 바깥쪽으로 빠지는 높은 공으로 넣어주는 요령도 알아야 하고, 포수의 판단과 감독의 지시, 그리고 팀원들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얘기를 기획자로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기획자의 주업무가 문서질이라고 해서 기획 문서질만 조낸 공부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경기에서 이기는 투수가 되려면 우선 야구의 전반을 이해해야 하듯, 제대로 된 게임 기획자가 되려면 우선 게임 개발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실무자들이 신입들에게(사실은 모든 기획자들에게) 요구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자가 강력하게 권장하는 방법이 바로 전편에서 언급한(기존 게임에 부속으로 제공되는 툴을 이용해서) 게임 만들어 보기이다. 워크래프트3 월드 에디터나 RPG만들기 등의 게임 저작툴은 프로그래밍이나 그래픽에 대해서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기본적인 사용법만 알면 금세 왠만한 미니 게임 수준의 완성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혼자서 간단한 게임만 만들어봐서는 게임 개발에 대해서 제대로 개념을 갖추긴 힘들다. 보다 효과적인 개념 이해를 위해서는 약간의 노하우가 필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후속편을 통해 하나씩 이야기하도록 하자.



ps) 기획자를 야구의 투수에 비유하는 것은 내가 지망생들에게 강의할 때 흔히 쓰는 비유이다.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대입을 해본 건데 생각하면 할 수록 기획자와 투수는 유사한 점이 많아 보인다.

야구에서 모든 플레이가 투수의 투구로부터 시작되듯이 게임 개발도 기획자의 기획부터 시작되는 부분이 많고, 투수가 공을 받아주는 포수, 그리고 작전을 지휘하는 감독과 호흡이 맞아야 이길 확률이 높아지듯이 기획자도 기획을 받아서 구현해주는 프로그래머/그래픽 파트원, 그리고 개발을 지휘하는 PD나 경영진과 호흡이 맞아야 개발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게임이 성공할 확률은 개발의 성공과는 또 별개의 문제지만)

게다가 수비시에는 투수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공격시에는 아예 나서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비중이 적듯이, 기획자도 기획 업무에 있어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지만 코딩이나 그래픽 생성 작업 자체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야구에서 투수가 미칠듯이 잘 던지면 한 점도 주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지지 않는 경기를 하듯, 개발도 기획자가 미칠듯이 잘하면 최소한 게임을 완전 말아먹지는 않는다. (적어도 난 게임 바닥 10년 동안 기획자는 조낸 잘했는데 프로그래머가 못해서 게임이 안나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케이스가 있으면 제보바람) 반면에, 야구에서 투수가 미쳐서(-_-) 초반부터 핸드볼 스코어로 실점하면 경기를 뒤집기 어려워지듯, 게임 개발도 기획자가 초반부터 제대로 국밥을 말아먹으면 그거 참 뒤집기 어렵다...



요즘에도 이런 MMORPG가 전혀 없진 않지만, 과거의 게임들은 온라인 기반이든 패키지 기반이든 능력치(스탯)나 스킬을 한 번 설정하거나 배우고 나면 다시는 고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예로 <디아블로2>를 보자. 이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치나 스킬은 포인트를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초기화하거나 수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클래스의 캐릭터를 여러개 키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랬던 블리자드 역시 그 이후에 개발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더 이상 이런 규칙을 고수하지 않았다. 능력치는 플레이어가 직접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클래스에 따라 자동으로 오르게 만들어 애초에 다시 찍을 이유가 없었고, 스킬도 같은 클래스면 다 똑같은 (물론 특정 종족만 배울 수 있는 일부 스킬이 있긴 하지만) 조건으로 배우기 때문에 초기화 할 이유가 없었다. 유일하게 플레이어가 선택해서 포인트를 배분할 수 있었던 '특성'의 경우는 모두가 알다시피 일정량의 골드만 지불하면 언제든 초기화해서 다시 찍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탯이든 스킬이든 한 번 찍으면 그걸로 끝이었던 <디아블로2>


그렇다면 플레이어에게 초기화 기회를 주는 것과 주지 않는 것,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방법이 옳은 방식일까? 교과서적으로 설명하자면 당연히 주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특히 캐릭터 하나를 육성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MMORPG의 경우 초기화 기회를 주지 않으면 능력치나 스킬 포인트 하나를 소비할 때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만약 플레이어에게 이런 압박감이 가중된다면 일부 하드코어 유저들은 좋아할지 모르나 대부분의 유저들에겐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게임 기획 이론서를 보면 이런 경우에는 유저에게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쪽이 옳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교과서가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과서의 내용은 단지 기본적인 가이드 라인일 뿐이며, 실전에서는 교과서에서 알려주는 기본을 얼마나 잘 응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교과서를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교과서에만 충실하다고 다 해결되면 게임 기획 참 편하게 하겠다...)

<디아블로2>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면, 유저에게 능력치나 스킬을 초기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저가 이를 바꾸려면 똑같은 클래스의 캐릭터를 하나 더 만들어서 육성해야만 하는 '불편'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디아블로2>의 게임 생명력이 길어질 수 있었다. 각자 기억을 되살려보라. '멀티샷20' 찍은 '활마(활 아마존)'로 앵벌하다가 지겨우니까 '자벨마(자벨린 아마존)'를 새로 키우고, 랜스 바바로 멥피 잡다가 PK방에서 안 먹히니까 칼 바바를 새로 키우고... 그러다 어느날 달력을 보니 한 3년이 그냥 지나가 있지 않았던가! (참고자료: TIG 카툰)

더우기 부분 유료화(라고 쓰고, 부분 무료화라고 읽는다)가 온라인 게임 상용화 방식의 기본이 된 지금에서는 수익성 측면에서 일정부분 (무료)유저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능력치나 스킬의 초기화 기능을 그냥 기본 서비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캐쉬 아이템이나 유료 서비스로 제공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수익창출 전략 중 하나라는 뜻이다. (물론 정액을 꼬박 받는 결제 방식이라면 이런 서비스는 당연히 기본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즉 교과서에는 항상 유저를 배려해서 유저가 불편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설계하라고 말 하더라도, 실전에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략적으로 유저를 불편하게 내버려 둘 필요'가 있고 또 그 불편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기획자의 중요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실전에서 교과서에 나온 대로 할 수 없다면 교과서로 공부할 의미가 없지 않나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규칙을 뛰어넘거나 변칙을 잘 구사하려면 누구보다도 규칙에 대해 통달해야 한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다니는 범죄자들을 보라. 그들은 누구보다도 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가진 헛점을 파고들어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전에서 교과서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누구보다도 교과서의 내용에 충실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본기부터 숙달하고 나서 응용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는 얘기다.

물론 시중에 나돌고 있는 게임 기획 이론서들은 대부분 교과서적인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응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나와있지 않거나, 혹은 그 교과서의 내용이 너무 오래전 이야기이거나 혹은 (번역서의 경우) 우리 실정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아직 현업 경험이 없거나 매우 적은 지망생 레벨이라면 그런 교과서마저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앞서 말 했듯이, 기본기에 충실해야만 기본을 응용하는 능력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온오프라인에 걸쳐 많은 게임 기획자 지망생들을 만나오고 있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교과서적인 기본기를 지나치게 무시한 채 당장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스킬부터 빨리 배우려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배우면 결국 자신이 지망생이었을 때 욕하던 그런 허접한 기획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ps) 여담이지만 <디아블로2>가 스탯과 스킬을 초기화할 수 없었음에도 유저가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이유는 캐릭터가 매우 쉽고 빠르게 렙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소위 말하는 '카우방'의 역할이 컸다. 골수 유저들 중에는 카우방 때문에 <디아블로2>가 이상한 게임이 되었다고 비난하지만, 카우방이 없었다면 <디아블로2>가 이렇게까지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빠르고 편하게 캐릭터를 고렙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콘텐츠가 없었다면 스탯&스킬 초기화가 불가능한 문제도 유저에게 심각한 스트레스 요인이 되었을 것이고 라이트 유저의 호응도 그만큼 감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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